2023년 10월 2일 밤, 사람이 운전하던 닛산 승용차가 보행자와 충돌했습니다. 보행자는 충격으로 옆 차로를 주행하던 크루즈의 무인차 앞에 떨어졌고, 크루즈 차량도 보행자와 충돌했습니다. 차량은 멈췄다가 갓길에 정차하려고 다시 움직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행자를 약 6m 끌고 갔습니다.

자율주행 사고와 책임 보고서.png

결정권이란

신차의 기본 사양은 누가 결정할까요. Paul Rogers와 Marcia Blenko가 2006년 《Harvard Business Review》에 소개한 자동차 제조사에서는 마케팅 담당자의 83%, 제품 개발 담당자의 64%가 각각 자기 부서에 결정권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두 부서가 같은 결정을 자기 권한으로 여긴 결과, 신차 출시 일정까지 지연됐습니다. 조직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가 결정할지 합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저자는 의사결정에서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한 RAPID를 소개했습니다. 판단에 필요한 사실을 모아 대안을 만드는 제안(Recommend), 필수적인 검토를 거쳐 공식 동의하거나 보완을 요구하는 동의(Agree), 결정을 실제 업무로 옮기는 실행(Perform), 현장의 정보와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정보 제공(Input), 그리고 **여러 대안을 비교해 결론을 내리는 결정(Decide)**입니다. 다섯 글자는 업무 진행 순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권한과 책임을 갖는지를 구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최종 결정권자(D)는 사안마다 한 명으로 정합니다. 그렇다고 최고위 임원이 언제나 D를 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택의 득실을 판단할 능력과 실행할 조직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이 적절한 수준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사실을 취합해 제안할 사람(R)은 관련 정보를 제공할 사람(I)을 찾아야 하며, 법률·규제처럼 반드시 충족해야 할 조건이 있다면 소수의 동의권자(A)가 진행을 보류할 수도 있습니다. 정보 제공자는 반드시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얻되, 그 의견이 최종안에 모두 반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동의권자가 요구하는 필수 조건은 단순한 참고 의견으로 넘길 수 없습니다.

권한의 배분은 결정의 성격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논문에 등장하는 제약회사 Wyeth Pharmaceuticals는 대규모 바이오 의약품 공장 투자를 준비하면서 본사 경영진에게 일부 민감한 사안의 동의권을 남기고, 투자가 결정된 뒤의 후속 판단 상당수는 생명공학 부문 책임자에게 맡겼습니다. 중요한 투자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실행 단계의 결정권은 해당 사업을 맡은 조직에 부여한 것입니다.

최종 결정권자(D)를 정한 뒤에도 사실을 누가 모으고, 반드시 확인해야 할 내용을 누가 제공하며, 어떤 조건에서 동의를 보류할지 정해야 합니다. Bain은 후속 분석에서 누가Who 결정하는지뿐 아니라 어떤 기준과 절차로How, 언제When 결정할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결정권자를 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누가 제공하고, 누가 그 내용을 확인할지까지 정해야 합니다.

image.png

신고서에 사실이 빠졌다?

다시, 돌아가서,

10월 2일 사고 다음날인 10월 3일 오전 6시, 크루즈의 위기관리 회의에는 직원 100명 이상이 참석했습니다. 충돌 이후 무인차가 다시 움직였다는 사실도 이 자리에서 논의됐습니다.

첫 신고서를 보낸 10일 뒤 1차 갱신 보고서에서는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법률 보조원이 '사고 관련 새 소식이 있는지 문의'했지만, 사고 담당자는 보행자의 건강 상태에 관해서만 답했습니다. 그는 사내 기록에서도 새 항목을 찾지 못하자, 보고서에 ‘변경 사항 없음’이라고 적어 제출했습니다. 갱신할 내용이 없다는 판단에는 상급자의 추가 검토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초 신고서에서는 사실을 아는 승인권자가 누락을 바로잡지 않았고, 10일 뒤 갱신된 보고서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실무자의 판단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사고 당시 크루즈는 여러 규제기관과의 회의에도 서로 다른 직원들을 참여시켰습니다. 사내 조사를 맡은 Quinn Emanuel은 모든 주요 사실이 관계 기관에 전달해야 하는 '총괄 담당자'의 역할을 맡을 인물이 불분명했다며, ‘배에 선장이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문서 승인권자가 존재했지만, 실제로 규제기관 대응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